2003 Drawing

2003 Drawing

바람

2003.11.19-2003.12.2

갤러리 피쉬

……

이관훈

김을 그림의 최근 행적은 드로잉을 주 작업으로 하고 있다. 그의 드로잉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간의 작업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2002년 초 도올갤러리에서 전시를 했었고, 이번 전시에서부터 2004년(갤러리 피쉬)까지 1년 단위로 세 번을 전시하게 되었다. 3년 간의 드로잉은 前작업들과는 달리 분명한 주제의식이 없다. 그래서 단계별로 나뉘어지는 것은 크게 보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단지 그 해에 표출되는 내면적 감정과 사유, 주변적 얘기, 어떤 사건, 그림(미술-예술)의 문제의식들을 별 고민 없이(?) 마음가는 데로 마구 그려나간 것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작품제목 중의 하나인 ‘바람’이다. 여기서 ‘바람’은 자연의 물리적인 현상을 지칭하기보다는 김을 인생자체의 은유로써, 그림에 대한 화두로써 상징적인 기호라 할 수 있다. 김을은 80년대 중반부터 이 ‘바람’의 형상을 무수히 습작해 왔지만 계속 실패를 거듭했고, 지금에서야 우연히 자연지리부도 책에서의 바람표기를 보고 그려냈다. 굉장히 싱거운 게임으로 끝이 났다.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 의도, 노력마저 다 빼앗아버린 그 바람의 실체는 다름 아닌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김을은 수년간 진지하게 작업해왔던 그림의 방식이나 소통방식을 가볍지만 간단명료한 조형적 언어로 구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해결책으로, 먼저, 그림을 드로잉 방식으로, 그 드로잉 방식은 사전(국어대사전 외)에 수록된 모든 텍스트를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무모한 시도로 출발했다. 그렇게 100여 점을 그리는 과정에서 문맥 없이 개별적인 접근을 하기보다는 전체를 통찰하는 전방위적인 시각과 사고를 지녀야 된다는 판단을 하게된다. 그래서 단편적 사고를 요하는 사전이 아닌 그간 살아오면서 체험하고 느끼고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들과 온갖 사물, 자연, 사건, 상상이 결합된 인문학적 산물과 태도를 그 대상(소프트웨어)으로 삼아 자신의 시각에 대입(Enter)시키는 방법을 취한다. 마치 컴퓨터처럼 자신의 소프트웨어에 눈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 데로 Enter하면 흰 A4용지에 결과물이 척척 나와버리는 방식이다. 이것이 최근에 터득한 ‘김을드로잉’의 소통방식이며 그리기 방식이며 자신의 작업 가닥을 형성하는 수단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김을은 일하며 만나며 살아가는 가운데 틈틈이 수많은 드로잉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 더 많은 결과물을 찍어 낼 수도 있다.

김을은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디지털’ 형식으로써 전개되는 것 같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김을은 종종 “나는 멀티작가다!”라고 농담조(?)로 말한다. 그 말들은 요즘세상의 소통방식이 ‘on-off’라는 디지털 방식으로 모두 이루어진다는 통념을 두고 언뜻 던진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고를 증폭, 확장, 상상, 자율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아날로그적 사고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이것이 그가 시도하는 전방위적 사고인 셈이다. 어쨌거나 김을 스스로 유머틱하게 멀티작가니 종합예술인이니 하는 것은 그러한 전방위적 사고를 갖겠다는 의지와 그림의 문제를 최대한 그림영역 바깥에서 다양한 실험으로 접근하는 태도라 말할 수 있다.

이런 행위와 태도로 인해 ‘김을드로잉’은 자신이 축적해온 아날로그 그림에서 세포처럼 극도로 세분화되어 다양한 형식과 형태를 띄며 빠른 속도로 흩어진다. 여기서 자칫 김을 감각이 디지털처럼 단순기호의 농락에 빠져 이미지 생산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디지털 유혹에 갇혀버린다면 디지털 기호에 박제되어버릴 위험도 있는 것이다. (전방위적 사고답게) 그의 드로잉은 몇 가지를 새롭게(적어도 김을에게는) 시도하는 기법이 있다. 도장, 복사, 차용, 긋기, 쓰기, 실물오브제 등이 그것이다._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