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Miscellaneous

Miscellaneous

잡화

雜畵

2006.5.10-2006.5.29

가갤러리 GAGALLERY

www.gagalle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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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雜畵)적 사고와 단순한 그림

우리의 의식 속에 과거에 경험했던 일들은 ‘시간’이라는 거름망을 거쳐 사라지거나, 침전되거나, 걸러져서 일종의 잔류물로서 남는다. 더불어 거미줄 같은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부산물로서의 단상들, 혹은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기억의 심연 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의 파편(fragment)들, 그리고 자의적 혹은 타의적으로 입력되어지는 사실들은 우리의 의식 속에 혼재(混在)하며 하나의 흐름을 가진 일관성 있는 사고(思考)와 공존한다. ● 이번 전시 제목인 “잡화(雜畵)”는 이러한 의식 속의 공존과 혼재에 따른 작품의 주제와 표현 방식의 변이(shift), 그리고 이를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작업 형식의 확장을 그대로 드러낸다. 2002년 이후 지속적으로 선보인 드로잉 연작에서도 김을은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특별한 주제의식 없이 즉각적인 제작 방식과 다작(多作)을 통한 “잡화”적 성격의 작업을 보여주었다. 김을은 그의 드로잉 안에 자신과 주변 이야기, 삶의 아이러니와 화가로서 그림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김을 식(style)의 무표정한 유머(deadpan humor)를 독특한 언어로 보여주었다. 또한 색(color)을 가급적 배제하고, “툭, 툭” 또는 “쓰윽, 쓰윽” 그려 낸 듯한 선과 기호화 되거나 차용된 이미지들은 때때로 화면 안에 씌여진 간략한 텍스트들과 상호관계를 이루며 하나의 드로잉 안에 집약적인 방식으로 나래이티브를 보여주기보다는 직접적이며 단순화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김을은 기존의 즉각적 제작 방식의 드로잉에서 “그리기”과정을 통한 페인팅 위주 신작들을 선보인다. “잡화”라는 전시 제목을 전면에 내세우듯이 김을은 하나의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특정한 맥락이 성립되지 않는 몇 가지의 연작을 시도한다.

김을의 “잡화”들을 분류해보자면 모노톤의 페인팅 작업으로 파일(file)의 일련 번호가 명시된 파일 연작, 락카 스프레이(Lacquer Sprayer)를 붓과 물감 대신 이용하여 그린 인물 연작, 인쇄물 위의 작은 이미지를 망점으로 확대하여 캔버스에 옮겨 그린 확대 이미지 연작, 캔버스에 간단한 오브제를 부착하여 제작한 컴바인 페인팅 연작, 그리고 두 개 이상의 풍경이 중첩된 풍경 연작 등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어둡고 텅 빈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버스 차창에 박힌 일반국도 77번 표지판이 서있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 내용물을 명확히 알 수 없는 포장된 물건더미, 세 개의 비슷한 크기의 빈 액자가 걸린 풍경들은 회색에 가까운 모노톤으로 그린 일상의 스냅사진과도 같은 파일(file)

연작의 일부이다. 캔버스 가장자리의 흰 바탕을 프레임처럼 남겨두고 파일을 철할 수 있는 구멍과 일련 번호를 일괄적으로 그려 넣은 이 연작은 차곡히 쌓인 묶음이나 축적된 파일에서 떨어져 나온 낱장 같은 각각의 작품들이 개별적이며 동시에 부분적인 작품임을 밝힌다.

기법적인 면에서 기존의 드로잉에 “찍기”가 사용되었다고 하면 이번 신작에서는 락카 스프레이라는 즉각적이며 키치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판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다. 다른 작업에 비해 색의 병치(juxtaposition)가 두드러지며 일부러 핀트를 맞추지 않은 듯한 인물은 앤디 워홀의 판화작품을 상기시키면서 더욱 단순화된 이미지와 함께 화면 안에 쓰여진 「화개운류(花開雲流)」, 「정직(正直)」 등의 텍스트들은 복고적인 한국적 팝의 감성을 보여준다. 종이 위에 인쇄된 작은 이미지들을 캔버스에 확대하여 망점으로 그려 원본 이미지를 왜곡, 과장하여 재이미지화하는 작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김을은 이미 비슷한 방식의 작업으로 널리 알려진 시그마 폴케(Sigmar Polke) 작품과의 유사성을 발견하여 「Hi Mr. Polke」란 제목으로 완성시킨 작품과 「P&K」란 작업에서 폴케의 작품과 유사한 망점 이미지와 자신의 자화상을 차별화된 망점으로 한 화면에 함께 그려 넣어 김을 스타일의 위트를 보여준다. 중첩 풍경화 연작에서 김을은 두 개의 상이한 장소에서 때때로 경험하게 되는 데자뷰같은 순간, 즉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서는 감성의 마력을 몽골의 넓은 벌판 풍경과 캐나다의 낯선 이름의 호숫가 풍경을 중첩 시키고 각각의 풍경을 그리는 두 개의 작가의 초상을 통해 불러 일으킨다.

김을의 작품 중에 「기하학과 나의 그림」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단순화된 두뇌의 측면 형상과 그 중심을 기준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그려진 마치 해독이 쉽지 않은 일종의 사이비 과학(pseudo-science)표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잡화”적 사고를 하는 작가의 뇌 구조를 유머러스하고 명쾌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시대의 변천과 사고의 흐름에 따라 예술가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변화한다는 작가의 말을 염두하자면 이번 전시가 동시대적 감각과 부단한 작업을 기반으로 한 김을의 작업이 어디까지 변화하고 확장되어 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