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EULLDALISM : DRAWING IS HAMMERING

EULLDALISM : DRAWING IS HAMMERING

2022.4.7 – 6.4

OCI Museum of Art, Seoul, KOREA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틀을 깨는 망치

뻥을 잡는 감옥

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 거야

– 장기하와 얼굴들 5집 타이틀곡 〈그건 니 생각이고〉 中.

 

있는 줄도 몰랐던 길 어쩌다 걸으면서 사명인 척, 어영부영 짜깁던 걸 남다른 맥락인 척, 집히는 대로 욱여넣고 깊이가 아득한 척… 구석구석 덧붙이고 부풀리고 포장하며 인생 살다 보면 질소 과자 욕하기도 뭐하다. 성공한 사족은 ‘신화’, 그르치면 ‘뻥’이라 부른다. 극적인 일화, 각별한 영감, 근사한 작업관… 뻔한 기대에 김을은, 저서 어딘가에 박힌 글귀로 답했다.

“내가 그린 건 맞긴 한데…기억이 없다. 에스프레소나 한 잔 마셔야겠다.”

갈 길 간다. 거짓말 한 켤레, 신화 한 벌 없는 벌거숭이로. 의도, 필요, 정치, 계산, 담합? 미주알고주알 누가 뭐라든 우직하게. 우직한 벌거숭이. 그가 김을이고, 그게 드로잉이다.

‘작업의 예행‘, ‘과정‘, ‘에스키스’, 드로잉의 지위는 한동안 그랬다.

시험 삼아 해 본 게, 뜻밖에 근사한 경우가 있다. 신다 버릴 작정으로 산 신발, 욱해서 쏘아붙인 별명, 급히 휘갈긴 글씨인데. 팔 걷고 각 잡고 용쓸 땐 나오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연습 삼아 그렸는데 본론보다 나으면? 그럼 그게 본론이다. 드로잉은 그렇게 광복한다. 자세 풀고 힘 빼고 각오를 놓아야 비로소 고개를 내미는, 또 다른 매력과 맥락을 인정받은 것. 너울대는 갑판에서 칼끝으로 두어 점 떠 혀끝이나 달래던 생선 살이, 마침내 ‘활어회’라는 이름을 달고 차림표에 정식으로 오른 셈이다. 그래서 김을의 드로잉은 우선 ‘싱싱한 날것’이다. 힘주어 다듬기 전이다. 포장도 미처 못 했다. 거짓을 바를 겨를도 없다. 이 태도를 그는 ‘솔직’, ‘정직’이라 한다.

흰 종이에 건식 재료로 선을 그어야 드로잉인가? 글씨, 조각, 움직이는 놀이 기구, 너덜너덜 곳곳이 찢긴 캔버스… 그에겐 정해진 꼴도, 도무지 딱 맞는 상자도 없다. 회화, 조각, 사진, 영상, 다른 틀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아 억지로 끼울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이미지/텍스트/입체/평면? 죄다 수단일 뿐, 특정 화법에 집착하는 건 바보”라고.

예쁘고 멋진 선을 그어야 수십 년 경력의 대가인가? 삐뚤빼뚤한 글씨 “나는 그림을 정말 못 그리는 화가다”. 그의 어느 드로잉 속 글귀이다. 잘 그린 드로잉? 드로잉은 ‘어느 틀에도 종속되지 않기’인데, ‘규격을 두르고 잣대에 아첨하는 드로잉’이라니. ‘뜨거운 냉커피’같은 건가? 예쁘게 쌓는 솜씨보다 쌓은 걸 깰 깡에 반한다. 바삭하게 잘 구운 도자를 살피며 새벽녘 흐뭇했던 늙은 도공이, 도로 몽땅 꺼내어 오밤중 망치질이다. 생각이 바뀐 모양. 늘 새롭게 생각하기. 틀 깨기. 타성 깨기. 작품을 망치 삼아. 그게 김을의 드로잉이다.

‘예비’, ‘실험’, ‘유예’와 같은 드로잉의 속성은 본래 ‘보조’, ‘과정’, ‘미완성’과 늘 맞닿았다. 차라리 그 어떤 형식과 생각의 틀에도 호락호락 팔짱 끼지 않고, ‘밀당’과 ‘어장관리’를 거듭한다. 신기하게도 그제야 영원한 ‘썸’을 타며 자립한다. 태도, 형식, 내용 삼면으로 그가 매일 자유로우려는 이유이다.

검정 쇠창살에 가둔 흰 캔버스. “억울해. 그저 ‘하얀 거짓말’인데.” 푸념하듯 삐딱한 자세가 사뭇 능청스러우면서도, 맥락 어딘가 뼈가 씹힌다. 감옥에 갇힌 그림? 죄와 벌엔 성역이 없다. 거짓을 일삼고 양심과 순수성을 훼손하는 양치기 예술, 피노키오 예술은 〈Jail〉, 감옥행이렷다.

전시장 복판에 솟은 오두막 〈Twilight Zone Studio〉. 그의 작업실이다. 쉰 개가 넘는 ‘틀을 깨는 망치’가 벽면 하나 가득 들어찼다. 이번 전시의 대표 아이콘이긴 한데, 그래도 저걸 다 쓰려면 그는 꽤나 오래 살아야 할 듯싶다.

오락실에 어울릴 듯 심상찮은 모양새의 〈Drawing Machine〉. 관객이 힘차게 페달을 구를 때마다 팡팡! 종이에 그림을 찍는다. 옆구리의 작은 창 너머로 분골쇄신하는 일꾼 김을 인형이 엿보인다. 이어 나무망치를 두들기고 손바닥만 한 도장을 쿵쿵 찍어본다. 드로잉 완성. 다만 놀이터의 분위기와 호쾌한 타격감이 전부가 아니다. 김을의 머리 실루엣을 따라 박힌 글귀 “Drawing is Hammering”. 그리지 않아도 드로잉, 흰 종이(묵은 틀)에 망치질(깨기)도 드로잉이다. ‘꼭 그려야만 하는 게 아니구나’, ‘고정관념을 쳐부수는 거구나’. 드로잉의 의미와 범위를 아울러 겪는다. 묵은 생각의 틀 ‘파손’하기. ‘틀을 망치는 망치’. 그게 바로 김을의 드로잉이다.

뿐만 아니다. 전시장 곳곳에 ‘김을’이 도사린다. 목마와 수레의 머리, 인형의 얼굴, 그림과 조각 곳곳에 등장하는 남자. 눈길을 사로잡는 쏙 빼닮은 민머리와 미소. 여유와 당당함이 반씩 맺힌 입가의 두 줄 주름. 때론 앙증맞고 귀엽게, 가끔은 조자룡 헌 창 쓰듯 매섭게 붓을 찔러대는 성난 아티스트로. 부연이 필요 없는 김을의 분신이다.

‘심각 vs 익살’ 밸런스 게임. 능청스레 둘을 버무린 이 균형은 그의 작업 전반을 꿰는 주요한 리듬이다. 작품 하나하나, 각 섹션의 구성, 전시 전체에 걸쳐 프랙털처럼 등장을 거듭한다. 아기자기한 수레에 달린 해골 나사가 눈길을 끈다. 망치와 감옥은 장난감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요란한 놀이터와 일 년 치 사색을 나직이 내건 벽이 공존한다.

줄타기는 단순한 유희이면서 김을의 화법이고, 또한 관객의 몰입 창구이다. “네~에. 그냥 장난이에요-오. 그림 그리기 싫을 때. 이놈을 끌면, 그림 그려주니까. 하하-“ 붙들고 캐물어도 그의 작업 설명은 대개 한 줄 내외. 나머지는 작업과의 오붓한 동행이 갈음한다. 귀엽고 사납다. 북적북적 황량하다. 초롱초롱 멍하다. 당당히 숨는다. 천진난만 골똘하다. 매몰차게 포근하다. 포복절도 숙연하다. 눈길로 리듬을 타다 어느새 첨벙! 상상 웅덩이에 담근 발을 빼며 뒤늦게 정신이 든다. ‘쥐락펴락’, ‘롤러코스터’, ‘일희일비’야말로 김을의 대서사에 몸을 싣는 드럼비트이다. 줄곧 무겁고 진중하거나 그저 키치하고 장난스러운 태도는 결국 뻣뻣하고 단조롭기 마련. 오래가지 못한다.

“그림 이 새끼”

작업 곳곳에 등장하는 글귀가 심상찮다. 뿐인가? 그림을 집어던지는 사람, 날아가다 철퍼덕 처박혀 벽 타고 흘러내리는 그림, 그림과 아웅다웅 핏발 선 눈겨룸, 잘 마무리하다 냅다 긋고 찢은 캔버스까지…유독 그림에 모질고 야멸차다. 노골적인 푸대접에 대놓고 찬밥이다. ‘화가 맞아?’ 싶다.

“작품을 망치 삼아”, 앞서 김을의 드로잉을 이렇게 소개했다. 작품은 그에게 신줏단지도, 열 손가락 자식도 아니다. 외려 쓰다 내던지곤 툭하면 또 찾는 늙은 망치이다. 실컷 써먹으면 그뿐. 애지중지 품고 안달복달 목맬 이유가 없다. 귀중과 유용은 다르다. 그림은 수단이다. 도구이다. 부산물이다. 확실히 ‘내 그림은 맞는데 기억이 없을’ 법하다.

“PAINTING is PAIN”

왜 하필 드로잉인지 알 만하다. ‘생각은 깊게, 그림은 대충’ 하려고. 목표는 발목 잡고, 집착하면 매몰되니까. 괴로우니까. 새빨간 바탕의 경고문 “아트조심”을 작업실 한복판에 떡 걸어둔다. 하루의 절반을 그림과 진하게 끌어안고선, 나머지 절반을 새삼 내외하며 안전거리를 지키는 태도야말로 무엇보다 드로잉스럽다.